한국의 대구 섬유도시 유래

기원전 2천년경부터 초피직물, 마직물 생산
‘나의 아내가 짠 세초가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좋으리라 하고 비단을 주었다. 그 비단을 임금님이 사용하는 창고에 두고 국보로 삼았다.’
세오녀가 짠 비단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임금이 국보로 삼았다는 내용의 이 기록은 신라시대 비단의 품질이 우수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삼국유사 「연오랑 세오녀」편에 전해진다.
대구가 섬유도시로서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일제시대, 6.25사변 전후라는 견해가 많으나 사실 그 훨씬 이전부터 대구섬유의 발달 토대가 이뤄지고 있었다.
기원전 2천년경 동진에서 초피직물, 마직물이 생산됐고 삼한시대부터 견직물을 생산하면서 신라시대에 이르러서는 마직물과 견직물 중심의 섬유산업이 본궤도에 이르렀다.

무명은 문익점 손자 문영의 이름에서 유래
‘정천익의 집에 호증 홍원 이란 사람이 들러 목화를 보고 고국의 산물을 다시 보게될 줄은 몰랐다며 매우 반가워했다고 한다. 이때 홍원을 머물게하면서 그에게 베짜는 기술과 기구 제조하는 방법을 배웠던 정천익은 가족에게 기술을 가르쳐줘 마침내 베 한 필을 짰다. 그후 10년이 못 돼 전국에 널리 퍼지게 됐다.’ (「한국인물전집 문익점 편」)
중국의 목화씨가 유입돼 우리나라 최초로 면직물이 생산됐던 곳이 경북 의성이다. 문익점의 처가인 의성에서 장인인 정천익에 의해 재배되던 목화는 문익점의 손자 문래가 그 이름을 딴 물레를 만들어 실을 뽑았고 문래의 동생 문영은 베틀을 만들어 베를 생산, 자신의 이름을 따 무명으로 전하게 했다. 이같은 역사적 배경과 내륙지방의 풍부한 노동력, 풍부한 용수 등은 오늘날 섬유도시 대구를 이루게한 초석이 됐다.

최초의 방직공장 동양염직소
수공업 위주의 대구 섬유공업은 1905년 공장제 섬유공업시대를 맞이했다. 달성군 공산면 지묘동에서 수직기 족답기 1대로 베를 짜던 추인호씨가 대구시 인교동에 족답기 20대로 동양염직소를 설립했는데 당시의 기록이 「대구시사」에 나와 있으나 공장설립 연대가 1917년이라고 돼 있어 추씨는 1970년 4월1일자 대구 매일신문에서 1915년이라고 확인하기도 했다.
추씨의 동양염직소는 후일 일제가 세운 조선방직보다 2년 앞서 설립된 최초의 방직공장으로서 한국 섬유공업이 대구에서 시작됐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추씨의 공장이 달성동으로 옮겨지면서 달성동과 비산동 일대 공장설립이 활기를 띄게 됐고 1920년대 달성공원 부근에는 20여개의 직물공장이 생겨나 당시 달성동 일대의 베틀소리가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공장에서는 1917년부터 여공 채용을 시작했으며 동양모시의 거래가 활발해지자 포목상이 번창하기 시작했다. 조선조 3대 시장의 하나였던 서문시장뿐 아니라 동문시장과 멀리 서울,부산 나아가서는 북간도, 서간도에까지 포목상인들의 활동이 미쳤다.

대구 명주시대의 개막
이러한 대구섬유업은 1918년에서 1920년 사이 일본인들에 의해 세워진 이다주, 가다포과, 조선제사 등 제사공장의 설립으로 명주시대의 도래를 맞이하게 됐다. 일본은 옛부터 양잠업이 성행했던 경북 성주, 군위, 예천지역의 풍부한 원료를 이용해 제사공장을 세웠고 양질의 생사를 일본으로 들여갔다.
그리고 중하급품은 시중에 흘러 나왔는데 동양염직소가 생사를 족답기에 넣어 명주를 생산해 냄으로써 대구 섬유업계에 전환점이 마련 됐다. 대구 명주의 명성이 보부상에 의해 전국 각지에 전해지자 타공장들도 생산제품을 명주로 전환했을 뿐 아니라 돈많은 지주들도 공장을 설립, 1943년까지 약 1천7백10대의 직기가 설치돼 호황을 누렸다.

일제시대의 대구 섬유 수난기
수직기, 족답기,역직기등 보잘 것 없는 시설이었지만 착실한 성장을 해오던 대구섬유업계는 1942년 일제의 기업합병정책으로 수난기에 접어 들었다. 기업합병정책은 명목상 고급제품을 만들기 위해 기업의 규모를 확대시킨다는 것이었으나 실제 목적은 전쟁수행에 필요한 물자조달이었다.
1943년 제1차 기업합병때 직기 30대를 한 단위로 기업을 합병시켰는데 대개 직기 5대를 갖추고 있던 우리 기업들은 자본이 풍부한 일본인들에게 공장을 넘겨줘야 했다. 그리하여 70여개에 이르던 공장들 중 10개의 일본인 섬유공장과 19개의 한국인 공장만이 남게 됐다. 살아남은 19명의 대구 섬유인들은 일제의 2차 기업합병에 대항했다.

대구경북견직물조합측이 전하는 그때의 상황에 따르면 대구를 방문한 조선총독부 식산국장이 대구 섬유인들에게 대구 직물업이 조선 전체 직물업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니 섬유업체의 정비가 시급하다며 기업합병을 설득했으나 설득에 실패한 일제는 경찰력을 동원했고 고 최익성 전 대구경북견직물조합 초대이사장은 고등계 순사에게 끌려가 실신할 정도로 매를 맞고 창문으로 달아나 다락에 숨어서 해방을 맞기도 했다. 이때의 기업합병으로 달성동 비산동 일대 직물공장이 전멸하고 침산동에 위치한 군소 직물공장들이 살아남아 후일 침산동 섬유단지를 형성하게 된다.

해방이후 1950년대 대구섬유
해방이후 사업체 일제조사를 살펴보면 한국섬유공업의 24.2%인 1백49개 업체가 경북에 입지해 있고 그 중 95개 업체가 대구에 집중돼 있다고 나와있다.
대구공업에서 섬유공업이 차지했던 비율은 33%로 역내공업을 대표, 해방후 재건 초기부터 섬유도시화가 형성됐음을 알 수 있는데 이처럼 대구섬유공업이 공업재건 초기부터 그 기반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타공업보다 기능 및 기술인력 확보가 용이했던 배경 때문이다.
인근지역의 풍부한 천연섬유자원과 유휴 노동력을 최대한 활용, 입지를 다져나간 대구섬유는 6.25를 거치면서 정치적, 사회적 격동기를 맞이해 수많은 기업을 생성, 소멸시키기도했다. 전국의 대형 면방업체들과 제사업체들이 정부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기업을 육성시킨데 반해 규모가 작고 자금이 영세한 대구 직물업계는 별다른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에 대구섬유인들은 집요한 노력으로 섬유산업육성을 위해 각종 제도를 마련했는데 특히 직물류세 철폐, 포플린 수입금지 조치의 실행은 후일 한국섬유산업 발전에 큰 활력소가 됐다.

직물류세 철폐 환호, 직물노래 불러
최종소비자에게 판매가격의 10%를 부담시킨 직물류세가 처음 제정된 것은 1938년. 일제가 전쟁준비를 위해 시행한 것으로 해방이후에도 세무공무원들이 공장이나 상점마다 직물세를 받기위해 진을 침에따라 상행위가 크게 위축됐다.
서문시장 포목상들은 세무공무원이 나타났다 하면 셔터문를 내리고 철시하는 소동을 벌이는등 섬유기업인들 뿐 아니라 판매상들까지 직물세 철폐를 요구하고 나섰으나 직물연합회 측에선 수수방관으로 일관했다.
결국 1954년 당시 경북직물조합 이사장이던 최익성씨가 서울에서 대 정부 및 국회 로비활동을 벌여 공식적인 직물세 철폐를 요구하고 나섰는데 직물세 존속을 요구하던 면방업계의 저항에 부딪쳐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대구 섬유인들의 노력 끝에 처음의 열세가 점차 만회되기 시작했고 분과위원회를 거치면서 「소비세는 최종 소비자가 부담해야 하니 직물세는 존속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과 「원사메이커에서 원천 징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기에 이르렀다.

1954년 3월 26일 분과위원회에서 본회의로 넘어감에 따라 찬반 투표결에 붙여지게 됐는데 결과는 재석의원 1백80명 중 1백11명이 직물세 폐지에 찬성하여 대구 섬유인들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 3월26일. 이 날을 기념하는 전국의 직물업자들은 직물의 날로 제정하고 직물노래까지 마련하였다.

포플린 수입조치에 결사 반대
직물세 폐지에 이어 포플린 수입문제를 두고 파동이 일어났다. 무역상들과 상공부 상역국은 국산 포플린 질이 형편없다는 이유로 소비자를 보호해야 한다며 질 좋은 일제 포플린 수입을 주장했다. 다시 직물업자들의 반발이 일어나고 수입 찬성 측과 반대 측의 공방이 치열해지자 고심하던 상공부장관이 공청회를 열었다.
공청회가 시작되자 상역국장은 일제 포플린 중 고급품과 국산 포플린 중 저급품을 들고 나와 비교하며 소비자 보호를 이유로 일제의 수입을 주장했고 뒤이어 나온 최익성씨는 사회를 보던 상공부 장관에게 무례함이 있더라도 이해하라고 앙해를 구한 후 “귀한 달러로 포플린을 수입하기 전에 상역국장부터 수입해야 한다.”고 일격을 가하고 “왜 두살밖에 안된 직물업계를 크기도 전에 죽이려고 하느냐” 며 1년간 수입 금지 조치를 해주면 질 좋은 포플린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해서 포플린뿐 아니라 모든 직물류가 외제의 홍수에 휘말림없이 착실한 성장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그 후 1960년대 들어서도 대구 섬유인들은 특정 외래법 수입 금지 조치를 위해 투쟁을 벌여 언제부터인가 중앙관리들 사이에서 ‘대구에서 간담회하면 골치 아프다.’는 말이 오가게된 것이다.

5월 불론사건
이런 와중에서도 대구 화섬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인 1950년대 중반 나일론, 아세테이트 등 화섬직물에 손을 댄 업체가 상당수 생겨났다. 전쟁으로 인해 모든 산업이 파괴돼 원료 수급에 어려움을 겪던 대구 섬유업자들은 일본과 미국에서 인견사, 스프 등의 원료를 수입해 모스린을 제직했고 간간히 나일론, 아세테이트사도 수입해 화섬직물을 생산했다. 당시에는 물건이 있는대로 팔려나가던 시기여서 원료의 수입이 곧 기업의 성장과 직결돼 원료수입을 위해 선달러 구하는 문제가 관건이었다. 정부가 원조로 들여온 달러를 입찰을 통해 민간에 불하했는데 대구 섬유업자들도 달러 낙찰을 보기 위해 대거 상경했다.
인견,아세테이트, 나일론 등을 낙찰된 달러로 주문하면 물건이 도착하기전 두세배로 오를 때여서 달러낙찰은 곧 떼돈을 버는 길이었고 이때 큰돈을 번 대구 섬유업자들도 많다. 대구지방에는 이때 화섬시대가 서서히 열리고 있었는데 염색가공시설이 전무해 경북직물조합이 경북염공이라는 염색공장설립에 나섰다. 염색기계는 부산 부두까지 들여왔으나 통관할 관세 및 공장건설 자금이 부족했다. 궁리 끝에 달러를 배정받아 업체에 배정하고 수수료를 받아 해결하기로 계획을 세웠으나 상공부가 반대했다. 이에 재무장관과 직접 절충, 60만달러를 따냈다.

계약금만 내고 달러로 원료를 수입한후 1년뒤에 갚기로 했으니 이때 만금과 버금가는 달러를 배정받은 대구 직물업자들은 한밑천 톡톡히 잡은 셈. 이 달러 배정사건을 두고 수사기관에서는 배정에 의혹여부를 수사했으나 유야무야되고 이후 「5월 불론사건」으로 기록에 남게됐다.

비로소 시작된 대구 화섬시대
1957년 4월 12일 삼경물산 경영주 이원방씨가 동구 신천동에 자본금 2억원을 들여 한국 나일론 공장을 설립, 1958년 10월 12일 나일론.스트레치공장을 완공했다. 일본에서 섬유무역으로 돈을 벌던 이씨가 한국으로 나일론 공장을 설립할 결심에 귀국했을 당시의 심경이 「나의정경 50년」이라는 회고록에 ‘한국에 합섬공장을 첫 설립할 생각에 온몸이 떨리는 것 같다.’고 밝혀져 있다.
스트레치 가공법은 나일론사를 가공해 촉감을 부드럽게 하는 것인데 한국나일론에서 나온 스트레치 나일론사가 양말공장으로 공급되면서 본격적인 나일론 양말시대가 열렸고 당시 전국 메리야스공업 생산의 10%에 머물던 실적은 30%로 증가, 나일론 양말의 붐을 일으켰다. 1963년 이씨가 스트레치 공장 뒷편에 나일론 필라메트인 화섬사 시설을 착공, 1964년 1월1일부터 2.5톤의 나일론 원사를 생산함으로써 비로소 대구 화섬시대는 개막하게 됐다.

1960년대 대구지역의 섬유산업발전은 가히 산업혁명에 비유될 만 하다. 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계획(1962∼1966)에 따라 내수 위주 산업이 수출 위주 산업화 되고 제2차 경제개발계획(1967∼1971)으로 수출전략산업화 됐다.
섬유공업이 전략산업으로 육성되면서 상업 자본이 공업 자본화된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서문시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직물 도매업자들이 대거 직물 제조업에 손을 대면서 섬유공업 성장에 결정적 기회를 부여했다.

직물 도소매업의 메카 서문시장
한때 전국의 직물시장을 주름잡던 서문시장. 그러나 직물도매시장으로서의 기능은 서문시장보다 동산동일대가 훨씬 앞서 형성됐다. 말전거리라 불리기도 한 동산동일대는 일제시대부터 해방 이듬해까지 직물 도매시장으로 번창했는데 현 동산파출소 주변은 직물 도매시장으로, 약전골목 주변은 직물 소매시장으로서의 기능을 했다. 해방 3년째부터 봇짐장수들의 몰락으로 서시에 상권이 이양되면서 비정상 루트로 나오는 면사, 나일론사 등이 거래돼 블랙마킷이라는 오명이 붙여지기도 했다.
한편 1948년부터 동산동 직물시장 상권을 이양받은 서시, 즉 서문시장은 급속도로 번창해 1968년 직물 도매상 전국 점유비율 24.4%에 이르게 됐다. 이후 1971년 33.7%에 이르게 되는데 이러한 섬유산업의 양적 증가는 품질 저하를 초래했다. 원사부족에서 오는 원사파동, 기능공 스카웃의 과열, 동업자간의 과당경쟁 등이 생산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생산성 저하와 질적 저하로 이어졌다. 이에 섬유류에 대해서도 품질검사제도를 시행하게 됐다.

수출검사제도의 시행과 품질향상
1957년 12월 상공부는 수출검사법을 제정하고 상공부장관이 지정하는 수출품목에 한해 품질검사제도를 시행했다. 1962년 면사 및 면제품이 최초의 섬유류 검사품목으로 지정되면서 대한메리야스연합회와 대한직물공업연합회가 자체적으로 검사기관 설립을 추진하게 됐다.
1964년 1월 한국섬유시범검사소가 공식 지정되고 견직물, 인격직물, 합성직물, 교직물에 대해 수출검사를 하면서 자수직물, 코듀로이직물, 타월직물에 대한 검사까지 확대실시하자 상공부는 검사기관을 독립법인화 시키도록 했다. 당국이 검사기관을 독립법인으로 만든 이유는 협회나 연합회 예속에서 오는 검사의 존엄성 및 독립성 실추를 막기 위해서였다.
이후 니트 및 의류 검사소도 각각 독립 법인화 됐는데 대구에 검사소 지소가 문을 연 것은 1970년 4월 27일이다. 훈련된 검사요원이 각 공장에서 생산되는 직물을 정밀검사하고 종합분석해 취약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해 줌으로써 대구는 물론 국내 섬유제품의 품질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섬유관련 조합의 결성과 공단조성
통계에 따르면 1963년도 대구 섬유 수출이 2백34만8천 달러로 대구시 전체 수출 2백57만5천 달러의 92%나 차지했다. (그후 나일론 타프타 수출이 늘면서 1967년 대구 섬유 수출은 2천4백51만 달러를 기록, 천만불대를 뛰어넘게 됐다.) 수출 드라이브정책에 힘입어 섬유업체 수가 증가하자 경북직물공업협동조합의 견직업자들과 면직업자들간에 알력이 표면화돼 1969년 견직업체들이 따로 경북견직물조합을 결성, 오늘에 이르게 됐다.
메리야스조합과 염색조합까지 모두 4개의 섬유관련 조합이 1960년대 결성됐다. 경북메리야스공업협동조합에서는 1969년 6월 기업의 다각화를 통해 생산성 향상과 수출가격의 적정유지 방안을 모색, 추진하고자 경북스웨터단지를 제 3공단에 조성했는데 제 3공단의 정식 명칭은 대구지방공업단지이다.

대구에 공단이 처음 조성된 곳은 대한방직이 자리한 침산동일대. 침산동의 제 1공단만으로는 공장수급이 어려워지자 도심의 상가나 주택가에 공장들이 무질서하게 들어서게 됐고 이에 건설부가 일종의 복합 공업단지로 조성한 것이 제 3공단이다. 건설부로부터 특별단지 허가를 받아 대구시가 기반을 조성하고 68년 12월 말 완공됐다.

나일론 붐
공단 조성에 따른 원사공장의 증설로 나일론 생산량은 더욱 증가했다. 수입 사용하던 나일론사를 1968년 한국나일론이 7.5톤 증설, 10톤을 생산한 이후 1964년 7월 경기도 안양의 한일나일론(이후 동양 나일론이 흡수)이 1.35톤의 나일론 필라멘트사 생산시설과 1968년 동양나일론 울산공장의 7.5톤 생산시설이 증설되면서 국내 충당이 그럭저럭 가능해졌다.
당시 나일론 직물의 인기는 나일론처녀 등의 속어까지 등장시킬 정도로 대단했다. 대부분의 부녀자들은 나일론 치마 저고리를 입어보는 것이 소원일 정도였고 일제 나일론점퍼를 입으면 상류층으로 인식될 정도였다. 처음 나일론직물을 짤 때 호부가 안돼 고전했는데 일본놀이라고 불리웠던 나일론사 한가닥씩에 풀을 먹이는 방법으로 제직했다. 나일론사 1파운드를 사용해 천을 짜면 10파운드의 나일론사를 살 수 있을 정도로 이윤이 좋았던 한편 수출용 나일론사 가격과 내수용 나일론사 가격차이가 4∼5배나 돼 일부 업체들은 수출용 나일론사를 시중에 빼돌리다가 쇠고랑을 차기도 했다.

폴리에스터의 시작
나일론 타프타로 한몫 보던 대구 섬유업계가 폴리에스터 직물을 본격적으로 생산한 것은 1970년대 초 부터다. 1960년대 후반에도 일본의 테이진과 동양레이온이 영국의 ICI로부터 기술을 도입, 테트론이란 상표의 원사를 조금씩 수입해 와 폴리에스터직물을 짰지만 1969년 선경이 수원에 7톤 규모의 폴리에스터사를 생산하고 난 후부터 조젯직물 등이 나오게 됐다.
원래 폴리에스터사는 경산 대한화섬에서 방사시설만으로 폴리에스터 SF사를 생산한 것이 국내 효시이지만 선경이 생산한 이후 삼양사 등에서도 생산에 참여하면서 본격화됐다. 대구 섬유업계가 폴리에스터 직물을 대량으로 제직하기 시작한 것은 EXPO ’70 이후 부터다.

서문시장의 퇴조
생사공업을 모태로 일찍부터 발전해온 섬유산업에 의해 대구는 전국 제일의 직물산지로 또한 세계 최대의 합섬직물공급지로 성장해왔다.
그 배경에는 거대 도매시장 서문시장이 수요와 공급을 이어주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온 공이 있었다. 그러나 전국직물 거래량의 절반이상(최고 52%)을 차지하면서 직물 도소매업의 메카로 자리잡아온 서시가 1970년대 들어 서울의 동대문시장에 서서히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1968년 서시상인들의 주 거래처였던 호남지방에 극심한 흉년이 들면서 호남지역 포목상들로부터 물건값을 제대로 못받은 업계가 연쇄부도 위기에 처한데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더욱 심화됐다. 경부고속도로는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묶어 경제성장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으나 모든 경제활동이 서울로 집중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때부터 대구에서 제조된 직물도 일단 서울 동대문시장을 거쳤다가 다시 대구로 역류하는 비효율적 구조가 형성됐다.

서시의 퇴락은 호남상인들의 서시거래 중단과 더불어 대구 섬유업체들이 수출 중심의 생산전략으로 전환하면서, 더우기 1970년대 말부터는 대기업 섬유제품이 내수시장에 직접 파고들면서 중소기업 주류인 대구 섬유업계는 수출 중심의 생산전략으로 전환, 내수시장을 등한시하게 됐다. 결국 서시의 퇴조가 대구섬유의 내수 발판을 무너뜨리는 악영향으로 파급됐다. 반면 대구지역의 수출증가는 1972년 세계적인 경기호황에 힘입어 가속화되고 있었다.

1차 석유파동의 난관
1973년 10월경 호조를 보이던 대구 섬유경기는 1차 석유파동이 일어나면서 급격히 냉각됐다. 석유가격 인상으로 인한 원가상승, 원자재의 가격상승에다 수출국으로부터의 오더감소로 제품의 가격이 하락하고 재고가 누적돼 생산 가동률이 저하됐다. 당시 코듀로이, 벨베틴 등의 면직물을 비롯해 홀치기, 쓰므기 등 견직물뿐 아니라 나일론 테피터, 폴리에스터 직물조차도 급격한 수출수요 감소를 보였다.
그러나 대구 섬유업계가 이전의 수출 호경기에 구축한 경제기반과 정부의 효과적인 기술 지원에 힘입어 1차 석유파동의 난관은 이럭저럭 극복할 수 있었다. 이때의 불경기를 배경으로 1974년 1월 19일에서 31일 까지 12일 간에 걸쳐 「대구지역 섬유공업 실태조사」가 실시됐다. 이 조사는 한국은행 대구지점, 대구상공회의소, 대구은행 등 3개기관이 인원과 예산을 공동으로 투지하여 실시한 것인데 지역적으로 1개 업종에 국한해서 시설, 설비, 재무, 생산에 이르기까지 정밀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조사는 대구시, 경산군, 칠곡군내에 있는 1천10개의 섬유제조업체를 대상으로 했으며 분석결과 밝혀진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설비면에서의 문제점은 기능공 절대수의 부족, 기술수준의 저위, 노동여건의 개선미흡, 임금제도의 미확립 등 지적되었고 시설면에서는 시설의 노후, 준비시설 및 정리가공시설의 부족, 규모의 영세성, 미등록 시설의 과다, 시설의 배치 및 공정간의 일체성 결여가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2차 석유파동 직전의 대호황
다행히 1974년 3/4분기를 지나면서 대구지역의 섬유경기는 회복세를 타기 시작했다. 1978년 국내공급만으로는 부족한 폴리에스터 필라멘트사를 긴급 수입까지 하면서 폴리에스터 직물을 생산하는 대호황을 맞았다.
이처럼 폴리에스터 필라멘트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배경은 불라우스 등 여성의복용 소재에 쓰이는 조오젯직물이 크게 유행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일론 테피터를 짜던 업자들마저 조오젯생산으로 몰리면서 조오젯붐을 형성했고 나일론과 폴리에스터의 생산비율은 1971년 57% 대 43%이던 것이 1978년 16% 대 84%로 완전히 역전됐다. 그러나 이러한 호황은 생산과잉으로 이어져 이후 대구섬유 성장의 발목을 잡는 계기가 됐다.

길고 긴 2차 석유파동의 파장
1979년 일어난 2차 석유파동은 1차 석유파동 때와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 큰 여파를 몰고 왔다. 같은해의 10.26사태로 말미암아 어려움이 가중되면서 물가상승, 수출부진, 국제수지 적자로 대구 섬유경제는 심각한 불황을 겪게됐다.
석유파동 직전의 조오젯이 생산량을 증가시켜 재고가 누적되기 시작했다. 일본산에 비해 가격경쟁력이 우세했었으나 국내 인건비, 원사가격 상승과 엔화의 평가절하로 인해 평방미터당 200엔, 일본산이 320∼330엔이던 것이 1979년 들어 한국산도 300엔대를 육박하게 됐다.

결국 품질향상을 수반하지 못한 생산과잉은 석유파동이라는 국제경기의 침체와 맞물려 성장의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조오젯붐도 퇴조해 조오젯 공정용으로 수입한 이탈리아산 1만5천대의 연사기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대구섬유산업사를 크게 보았을 때 석유파동을 기준으로 그 직전의 대호황기와 그 직후의 침체기로 나눌 수 있다. 두차례에 걸친 석유파동은 그간 내재됐던 대구섬유산업의 구조적인 모순을 들춰냄으로써 지역 업계가 풀어야 할 숙제를 남기게 됐다.

1980년대 대구지역의 섬유공업 경기동향은 크게 1985년까지의 비교적 긴 불황과 그 이후의 호황으로 나뉘어 진다. 1970년대 후반 약 4∼5년간 지속되던 조제트붐이 제 2차 석유파동 이후 급격히 냉각되면서 지역 섬유업계는 상당히 긴 불황의 터널을 맞게 됐다.
대구지역 섬유산업사에서 1970년대를 고도성장기라고 한다면 1980년대는 대내외적 환경변화로 인해 외형적 성장과 동시에 내용적 시련을 맞게 되었고, 또한 그런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지역섬유업계의 질적 전환이 모색됐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1980년대 대구지역 섬유산업에서는 몇몇 중요한 특징들이 나타나고 있다. 섬유산업 내부에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합섬직물의 주요품목이 변경되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를 나이론 태피터의 시대였다고 한다면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는 대대적인 폴리에스터 조오젯 붐이 일어났던, 폴리에스터 직물시대였다. 그러다 1985년을 경계로 합섬직물에서의 주요품목이 조오젯으로부터 쟈카드와 파레스로 전환되었다.
1987년 대비 1988년 품목별 수출증가율을 보면 (한국섬유직물수출입조합「섬유직물」1988년 2월호 및 1989년 2월호 참조) 조오젯은 25.0%의 감소를 보이는 반면 쟈카드와 파레스는 오히려 29.0%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나일론 테피터의 경우 0.3% 증가했으나 1970년대의 증가속도에 비하면 매우 낮은 것으로서 계속된 쇠퇴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1987년의 합섬직물 수출물량은 일본을 제치고 세계 제일의 수출국으로 등장했으며 1988년에는 그 위치를 확고하게 굳혔다. 당시 폴리에스터 직물의 한국 대 일본 수출물량을 비교해보면 10년전 17% 대 83%이던 것이 1987년에는 52% 대 48%로 역전됐다.

그 배경에는 1980년대 중반부터 일본 엔화의 강세에 따른 영향으로 일본 직물수출이 감소한 원인도 있었는데 우리나라 섬유수출이 일본을 추격한 것처럼 인도네시아, 태국 등 후발개도국이 원고 현상을 맞은 우리 섬유를 추격하고 있었다. 후발개도국의 섬유산업은 이미 수입대체 단계를 거의 마무리하고 저임금을 무기로 저가품, 대량생산품 위주의 수출산업화를 추진하면서 기존 우리나라 섬유시장을 급속도로 잠식해 나갔다. 특히 인구 1억 6천만명의 내수시장을 바탕으로 1975년부터 가공산업이 발전해온 인도네시아의 합섬직물은 대구업계에 중대한 도전이 되고 있었다.

한편 국내에서는 1987년부터 전국적으로 일어난 노사분규 문제에 대응이 요청되던 시기였다. 노사분규의 가장 큰 쟁점은 근로조건 개선, 임금인상, 미조직사업장의 노동조합 결성으로 집약된다. 그 결과 1987년 노사분규 이후 약 20%에 가까운 임금인상이 있었으며 1987년말까지 대구·경북지역에 총 23개의 섬유업체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1980년대 안팎으로 일어난 일련의 시련들을 극복하기 위해 대구지역 섬유업계는 자구책 마련에 몰두하기도 했다. 섬유기술진흥원에서 주최한 섬유직기전시회를 비롯해 대구 KBS방송국에서 주최한 섬유축제 등 각종 행사가 활성화 되었다.

1984년부터 시작된 대구섬유대축제
대구섬유대축제는 역내 섬유공업 활성화를 위해 개최되었으며 노사·산학 협동체제의 화합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국제 경쟁력 제고를 위해 섬유기술개발전시회 및 품질비교전시회를 매년 개최하고 있으며 1989년부터는 대구패션협회 주최의 대구컬렉션이 매년 개최되고 있다. 대구패션협회는 다운스트림이 특히 약한 대구섬유업계에 패션산업을 뿌리 내리겠다는 취지로 1989년 1월 10일 발족되었다.
대구패션협회의 기본목표는 하이패션산업에 있어서 생산성의 과학화 실현, 유통 및 구매선의 대구지역 유도, 수출시장 개척 및 해외정보 흡수를 위한 국제행사 참가, 회원사의 권익옹호 및 상호친선 도모, 패션소재 및 부자재의 공동개발 및 보급, 국내시장에서의 회원사 공동 대처 등이며 현재 지역 하이패션 업계의 간판급 업체 40여개 회원사로 구성되어 있다.

패션업체가 지방패션산업의 활로를 모색하고자 자구책을 마련하는 동안 직물 제조업체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섬유시설 보유대수의 증가 및 자동화율의 확대를 들 수 있다. 급속한 자동화율의 증가가 가능했던 것은 1986년부터 시행된 공업발전법으로 직물업이 합리화 업종으로 지정되면서 1천8백억원의 산업구조 조정자금이 지원, 시설개체가 다소 용이해졌기 때문이다.

섬유시설 보유대수의 확대와 자동화율의 증가는 대량 생산체제를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염색가공부문도 강화되었다. 1987년도 통계 대구·경북 소재 염색업체는 총 295개로서 이 중 94.2%인 2백78개 업체가 대구에 소재하고 있다. 이는 전국 염색업체의 40.5%를 차지하는 비율이다. 1980년대 초까지만해도 섬유산업에서의 염색공업 기술은 상당히 뒤떨어져 있었으나 비산염색공단이 조성되고 1987년 1월, 염색공업 합리화 업종 지정, 1987년 8월 3만84KW의 열병합발전소의 완공 등을 통해 괄목할만한 성장을 하게되었다. 더구나 대구염색공업협동조합의 단결력은 여타 섬유협동조합의 모범이 되어 염색공업의 체질이 강화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1980년대의 발전적인 변화 중 하나가 섬유업체 특별학급 및 부설학교 설립이 활발해졌다는 것이다. 산업체 특별학급은 기존의 중고등학교에 산업체 종사자를 위해 학급을 설치, 산업체에서 기본학비를 부담하는 조건으로 운영되는 제도이며 산업체 부설학교는 주로 대기업에서 직접 학교설립허가를 받아 자사의 종업원을 대상으로 정식 중고등교육울 실시하는 것이다.
산업체 부설학교에 해당하는 학교가 갑을방적(주)이 설립한 이현여자실업고등학교, 한일합섬(주)이 설립한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 제일모직(주)이 설립한 성일여자실업고등학교 등이었으며 이러한 제도는 종업원이나 고용주 양자간에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 가정형편상 학업을 포기하고 직업전선에 뛰어든 종업원에게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며 이직율이 높은 섬유업체의 이직율울 낮추는데도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대구지역에 염색공장이 처음 세워진 것은 1907년, 당시 일본인 자본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한국인 자본에 의한 최초의 염색공장은 1915년 지금의 인교동에 설립된 추인호씨의 동양염직공장이다. 대구에서의 근대적 염색공업은 가내공업형태이기는 하지만 족답기를 사용한 때부터로 보고 있다. 당시 추인호씨가 손으로 지거(jigger)를 사용, 염색하는 방법을 씀으로써 대구 지거염색의 원조가 되었고 추씨는 현재까지도 이 지역 직물 염색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에 대구의 동양염직은 평양의 염색공장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그 기반을 다져왔는데 족답기로 직물을 짜던 수공업 시절의 염색기사들 인기는 상당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당시의 염색형태는 아직 본격적인 공장제 공업형태가 아닌 신천에서 드럼통을 잘라 가마솥을 만들고 염색을 하는 방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1950년대까지 대구의 염색은 세계적 추세와는 달리 주로 면이나 레이온류 제품이 절대 주종이었기 때문에 염색방법도 쉽고 단순한 배치(batch) 가공이 전부였으며 일부에서는 소위 판베기라하여 날염이 가미되는 정도였다. 또 사염기법에 있어서는 실타래를 솥에 넣어 삶는 식의 방법이 전부였다.

공장규모 대형화에 따라 늘어나는 종사자
1954년경에는 대구에 경북염색업의 52.2%인 24개 공장이 입지해 있었으며 1956년 1백64개, 1957년 66개, 1958년 36개, 1959년 53개 업체로 1956년을 정점으로 점차 줄어드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업체의 종사자가 1957년 1천2백49명, 1958년 1천4백27명, 1959년 3천1백24명로서 증가했는데 이렇듯 기업체수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종사 인원수가 증가한 것은 기업 규모의 대형화 때문이다. 업체수가 1백64개에 이르던 1956년 당시, 대구를 중심으로 1백여개의 가내공업형 공장들이 난립해 있었는데 종업원수 5명 이상되는 업체는 66개에 불과했다. 종업원수 50명 이상 규모는 3개 업체 뿐으로서 이들 몇몇 중견 공장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영세 공장들은 사염 및 표백가공을 담당하는 정도였다.

1958년의 전국대비 대구염색공업의 점유율을 보면 기업체수는 28.8%, 종업원수는 44.1% 였다. 1956년 이후들어 경인, 부산지방의 염색공업이 부흥한 것과는 반대로 대구 염색공업이 노후시설 등에 의한 상대적 쇠퇴경향을 보였던 것처럼 나타나기도 했으나 1950년대 전반에 걸쳐 대구가 한국염색공업을 주도해 왔던 것은 사실이다.

나일론, 폴리에스테르 등장으로 염색법 혁신
1950년대 말부터 외국에서 유입된 나일론사의 등장은 염색가공업에 혁신을 가져왔다. 미군물자에서 유입된 나일론 제품과 일부 밀수꾼들이 들여온 외제 나일론 양말, 그리고 대구의 동산양말을 비롯한 국내 유수 양말업자들이 나일론 양말을 선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는 당시 의류혁명을 예고하는 것으로서 이런 변화로 인해 염색가공업 또한 양적·질적인 면에서의 변화가 불가피 하게 됐다.
왜냐하면 나일론이라는 신소재의 염색방법은 면과는 전혀 다르고 특히 필라먼트사의 염색은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으로는 염색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초에 있었던 경북염색, 태양염직 등이 보유한 염색시설은 지거와 토우 염색기 정도로서 주로 선염을 해왔었으나 새로 나온 나일론사의 염색 결과는 얼룩이 지기도 하고 색깔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으며 나중에 색소가 빠져나오기도 하는 등 견뢰도면에서의 문제점들도 발생했다.

1961년 대구지역의 염색공장은 모두 46개였으며 종업원수는 803명이었다. 이와같이 1960년대 초에 염색공장이 많은 것으로 나타난 이유는 직물업체들 중의 일부가 자체 염색을 위해 공장내에 염색부를 두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일부 가내공업 형태의 중소염색공장도 다수 있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나일론 테피터의 생산이 증가하고 수출이 급격히 신장되면서 나일론 배치 염색 및 코팅가공, 즉 수지가공 등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1968년 이후 폴리에스테르 직물의 생산이 증가하면서 이에 대한 염색방법도 발달되었고 의생활의 혁신에 따른 특수직물의 염색방법도 개발되게 된다. 이렇듯 염색업계의 생산활동은 항상 직물, 메리야스 등 섬유제품업계의 경기동향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직물업계가 1979년 하반기부터 심한 경기 침체를 보임에 따라 염색업계도 1980년대 중반들어 전에 없던 불황을 겪게 됐다. 즉 1979년 1월 까지만 해도 전업체의 71.8%가 정상가동을 했으나 그 후 계속되는 휴·폐업 업체의 중가로 인해 1980년 8월 정상가동업체 비율은 53.0%에 지나지 않는다.

지역염색업계 의지로 일군 비산염색공단
1985년 1월 11일은 대구 염색업계의 숙원사업이던 비산염색공단 열병합 발전소가 착공된 날이다. 총 2백98억원의 공사비가 투입, 2년 7개월간 공사기간을 거쳐 1987년 8월부터 시험가동에 들어갔고 그해 9월부터 전기·증기 에너지를 비산염색공단 입주업체에 본격적으로 공급하게 됐다. 열병합발전소는 3만8천kw의 전기에너지를 생산, 공급하는데 여기서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시간당 증기열은 6천만kcal로써 연간 에너지 비용 1백25억원을 절감시켜 염색가공 경쟁력강화에 기여하기도 했다.
이는 비산염색공단 입주업체의 염색가공원가를 10%정도 절감시킬 뿐만 아니라 개별업체의 대기오염을 방지함으로써 산업공해를 줄이는 등 2중 효과를 가져왔다. 열병합발전소가 위치한 비산공단은 총 25만평 규모로 경북염색공업협동조합이 관계당국에 염색전용공단 조성을 강력하게 건의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조합에서는 업계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공단 조성을 꾸준히 추진해 왔는데 경상북도와 대구시가 도시환경 개선의 필요성에서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에 따라 당국은 조합에서 지시한 후보지를 대상으로 상공부, 공업진흥원 및 학계공동으로 입지의 타당성을 조사, 현재의 위치로 적지를 선정하고 대구시가 사업실행기관이 돼 조성계획을 수립, 조합이 회원업체를 상대로 입주신청을 접수하는 등의 사업에 착수, 1977년 3월 입주희망업체가 총회를 개최하면서 염색공단조성 추진위원회를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순조롭게 상황이 진척된 것은 아니다. 당시 대구시로서는 공단 조성사업비를 부담할 재정능력이 없었으며 용지 매입에서부터 기반조성사업에 이르는 사업비용을 입주업체가 선납입하지 않는 한 공단 조성은 불가능한 실정에 이르렀고 사업 시행이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추진위가 1979년 11월 9일 회의를 개최하고 입주결의를 확인하는 절차로 토지대금의 일부를 선납입할 것과 자체 추진력 보강을 위한 위원의 추가선임을 결의한후 즉시 총회를 소집, 결의사항을 추인받고 대구시에 사업의 조속한 시행을 강력히 촉구함으로써 약속을 받아내게 됐다.

대구시는 이듬해인 1978년 4월 도시계획시설 결정 승인을 받고 토지대금 납입 방법에 대한 입주신청업체의 동의를 받아 그해 7월부터 토지를 매입, 본격적인 추진이 이루어 졌다. 이듬해 3월 공단 조성사업 실시계획이 허가되고 토지매입을 완료, 10월에 정지 및 도로정비 등 기반시설공사에 착공하게 됐다.
그리고 1백13개 업체가 공단 내 입주한 오늘에 이르른 것이다. 현재의 대구경북염색공업협동조합은 한국염색공업협동조합 경북지부가 모체가 돼 1966년 7월 12일 창립총회를 개최했었다. 회원업체 수가 가장 많았던 때는 1974년도로 2백50여개에 이르렀으나 점차 감소해 1998년 3월 현재 2백5개 업체가 가입돼 있다.

1998년 합섬직물의 위기
1985년도에 우리나라가 일본을 제치고 세계 1위의 화학섬유직물 수출국으로 발돋음한 이후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오던 섬유직물류의 수출신장세가 1998년도에는 IMF라는 국가적인 경제환란과 세계섬유소비수요의 위축, 그리고 전통적인 수출성장기반이던 홍콩시장의 붕괴 등에 의하여 처음으로 수출 감소세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폴리에스테르직물을 주종으로 하는 합섬직물업종의 구조조정은 이 보다 앞선 1995년부터 서서히 시작되었는데 그 주요 요인은 중국의 대홍수, 인도네시아, 태국 등 동남아 후발국가들의 섬유산업 급성장, 미국, EU 등의 경기침체 장기화와 같은 대외적인 시장환경 악화와 국내적으로는 동종업체간의 단순 중·저가품의 대량생산 및 과당경쟁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데 기인하였다.
즉 세계의 섬유소비수요가 급속하게 고기능화, 다양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섬유산업의 환경은 물량위주의 출혈경쟁에 안주함으로서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1997년 7월을 기점으로 그 동안 범용성 중·저가 제품에 의존하여 오던 많은 합섬직물수출업체의 부도가 대구·경북지역을 중심으로 급증되기 시작하여 1998년도에 그 절정을 이룬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이와 같은 합섬직물업체의 부도급증은 또 다른 생산과잉과 수출거래질서의 문란으로 이어짐으로써 1998년도의 합섬직물의 수출경기는 그 어느 해 보다 고단하고 어려운 한 해였다.

WJL도입과 합섬직물의 대량생산
국내 합섬직물은 범용적이고 단순 중·저가 제품생산용 WJL이 대량도입된 90년대 초반부터 생산능력이 크게 신장되었는데 1995년도의 경우 중국 및 중남미지역으로의 수출호조에 힘입어 전년대비 출하액이 무려 46.2%나 신장되었다.
하지만 신제품개발이나 세계섬유소비규모를 감안하지 않은 단순 중·저가품 중심의 이러한 단기간의 생산능력 급증은 결국 동종업종간의 과잉생산을 유발하여 수출경쟁력을 하락시키는 요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중국의 섬유생산자급화 정책과 미국 등의 경제불록화 정책추진 등으로 1996년도에는 출하액이 오히려 감소되고 말았다. 출하액 감소는 결국 생산과잉에 의한 경영압박을 가져와 부도를 유발시키는 계기로 이어졌다.

1997년 한 섬유전문지를 통해 추정조사된 자료에 따르면, 1994년 이후 부도난 합섬직물업체는 88개 업체이며, 이들 업체가 보유하였던 직기는 약 7천여대로, 이 가운데 WJL이 약 5천여대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점차 다양한 복합 교직물 개발이 가능해진 AJL이 업계의 새로운 선호 직기설비로 부각되고 있으며, 고부가가치의 다품종 소량생산이 가능한 레피어직기의 증설·개체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업체들의 WJL의 폐기는 가속화되나, 과당경쟁읕 통한 출혈로 신규장비도입은 지연되고 있다.

합섬직물의 수출부진
합섬장섬유직물의 수출총액이 1997년도는 전년대비 6.2% 정도가 감소되었으나, 1998년도에는 전년대비 무려 21.1%가 줄어든 36억 달러에 머물렀다. 합섬장섬유직물수출의 92%를 차지하는 폴리에스터 직물수출이 1997년의 5.1% 수출감소세에서 1998년에는 19.7%까지 늘어났으며, 나일론 직물류도 34.7%나 수출이 감소되었다. 이와 같은 수출의 감소세는 1999년도까지 이어지고 있어 수출시장의 다변화 뿐 아니라 수출품목의 다양화, 고급화에 대한 필요성이 여실히 강조되고 있다.

이와 같은 수출부진현상은 세계 최대 합섬직물산지인 대구·경북지역의 섬유산업에 큰 영향을 미쳐 전반적으로 산업조업율을 크게 떨어뜨리는 결과를 유발하였다. 아울러 폴리에스터를 중심으로 하는 대부분의 섬유수출상품의 수출단가도 IMF로 크게 평가절하되었던 원화가치를 회복하지 못함으로서 업계의 채산성을 최악의 상태로 만들고 있다.

밀라노 프로젝트의 추진
국내 주종수출분야인 합섬직물업의 수출경쟁력이 이처럼 애로를 격음에 따라 정부에서는 1998년 9월 “대구·경북지역 섬유산업 육성방안” 수립하고, 1999년부터 2003년까지 6,800억원을 투입하여 대구지역을 섬유의 고부가가치화 및 차별화제품 생산·무역 지역으로 전환시켜「아시아의 섬유중심지」로 발전시킨다는 일명 “밀라노프로젝트”를 발표하였다.
그 구체적인 계획을 살펴보면 섬유의 기본 원료인 화섬사의 고기능·고감성 소재개발을 촉진시켜 고급원자재 공급을 확대하고, 제직, 염색가공, 섬유기계 업계의 기술력을 향상시켜 제품차별화를 통한 고부가가치 제품중심으로 전환을 촉진시킨다는 것이다.

또한 대구를 해외시장에 고급 중간재(직물 등) 생산·공급기지의 역할을 수행케하고, 수도권지역으로의 고급 패션소재 공급을 확대하여 의생활문화창조에 기여하게 함과 동시에 지역의 텍스타일디자인 및 패션디자인 산업을 육성하고, 섬유산업 및 시장정보 제공을 통해 상품기획 기능을 향상시켜 의류·메리야스 등 고부가가치의 패션제품 생산을 확대한다는 것이다.

답글 남기기